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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9
김용선
처음으로 진짜 나를 알아보신 분
처음으로 진짜 나를 알아보신 분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모조모로 몸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가락 끝까지 다 전 같지 않다보니 식구는 알아보고 보약을 지어주겠다고 보채는데
여러 날을 만류하다가 결국 처가의 사돈되시는 분이 하시는 춘천의 한의원을 갔습니다.
30대 젊어서도 한번 이 댁에서 지어주신 약을 먹었는데 그렇게 달고 살던 감기가 몇 년은 얼씬도 안 해서 참 신기하고 감사했던 적이 있어서 주말 막히는 길을 뚫고 4시간이나 걸려서도 기대를 하면서 갈수 있었습니다.
30여년 만에 뵌 원장님은 80대이셔도 정정하셨고 10분정도 맥을 짚고 이런 저런 질문을 하시더니
“성미가 많이 급한데도 눌러 참아 내색 않고 사는군요.”
하셨습니다.
성미가 급해 생겼던 많은 일들이 있지만
30대에는 짜장면을 급하게 먹다가 스텐 젓가락을 깨물어 입안에서 부러진 토막을 3개나 뱉어냈고 최근에서 금이 갔던 어금니가 2조각이나 깨져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 후로 식사습관을 고치기 시작해서 지금은 아주 천천히 먹느라고 혼자 먹기 일쑤입니다.
제 성미가 본래 많이 급하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직업이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고 말을 조곤조곤 한다고 듣는 편이고 일을 꼼꼼하게 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 아내만 “꼭 일을 닥쳐서 후딱 하려고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이렇게 미리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건 일을 오랫동안 치밀하게 붙들고 있질 못하기 때문인데 아내만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선생님을 많이 원망했었는데 숙제를 내줘도 전과 책 여러 페이지를 공책에 베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연필도 잘 부러지고 지우개는 공책을 찢어먹을 만큼 돌덩어리 같은 걸로 공책 10 페이지만큼 써가야 했으니 성질 급한 저는 이런 숙제를 끝까지 다 해간 적이 별로 없었고 자막대기로 손바닥을 맞아야 했습니다.
이런 저의 성미는 나이가 먹어 직장생활하면서 여지없이 약점이 되었고 이를 악물고 극복해야 했습니다.
16절지 갱지 3장에 먹지 2장을 겹쳐 타자기로 공문을 작성하려면 한 번의 실수가 한 나절을 공쳐야 했으니 꼼꼼하지 않을 수 가 없고
한번에 1,000스텝 2,000스텝 프로그램 짜면서 버그 하나만 있어도 업무가 온통 뒤집혀 버렸으니 살피고 따져보고 또 살피는 일이 피를 말리는 지옥 같은 일이었습니다.
진득하니 앉아 1시간도 못 버티던 저는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프로그램개발 업무의 특성에 밤을 풀풀 새워야 해서 엉덩이는 살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납기가 없고 검수가 없는 하고 싶은 일을 아무 때나 하면서도 돈 버는 일이 없을까?”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4시간은 일어나지 않고 화장실도 안가고 일 하는 사람이 되었고
문서하나를 일주일이라도 붙들고 만들 수 있고
그림하나 그리자고 2시간이라도 꼼짝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성은 본성입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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